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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1959

제약보국(製藥報國) 소명 아래 뭉치다

01.

광복 후 제약업계, 새 출발점에서 맞잡은 손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조선은 일본의 병참기지로 전락하며 제약업계도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총독부는 의약품 배급제를 시행하고, 일본 제약사가 시장을 잠식하며 민족자본 제약업소는 설 자리를 잃어갔다.

1945년 광복은 자유를 안겨주었지만 곧 분단과 혼란이 뒤따랐다. 미 군정은 보건후생부와 약무국을 설치해 현대적 보건·의료 행정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구호의약품으로 들어온 ‘다이아진’과 ‘페니실린’ 등은 국민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외국 의약품에 대한 의존이 심화되면서 국산 의약품은 외면받았다.

또한 일본 기업의 재산인 ‘적산’ 처리 문제는 업계 갈등을 불러왔다. 미 군정은 몰수한 제약회사와 약국을 한국인에게 인계했지만, 이를 둘러싼 이권 다툼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자 제약인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조직이 바로 조선약품공업협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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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6.25 직전의 제약시설
02.

산업계 최초의 협회 조선약품공업협회 창립

광복 후 제약업계는 사회적 혼란, 구호의약품 범람, 원료난이라는 3중고에 시달렸다. 제약인들은 “업계가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고, 필요한 약은 우리 손으로 만들자”는 뜻을 모았다. 그리고 1945년 10월 26일, 서울 서대문구 정동 종로기독교청년회관에서 65명의 업계 대표가 모여 조선약품공업협회를 창립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80년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당시 255개 제약업체 중 실제 공장을 가동한 곳은 30여 개에 불과했지만, 주요 인사 대부분이 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이들은 “제약업 발전에 신명을 바치자”고 다짐하며 초대 위원장에 전용순 금강제약 대표, 부위원장에 이경봉 제생당약방 대표와 김종건 삼성제약 대표를 선출했다.

65명의 회원으로 출발한 협회는 1946년 서울 충무로 조흥제약 건물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제1회 정기총회를 열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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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7 대한약품공업협회로 개칭 후 열린 제3회 정기총회
03.

불안정한 사회 상황에 공동대처

광복 이후 구호·밀수 의약품 범람에도 불구하고 1949년 말 국내 제약업체는 344곳, 생산품목은 3,861종으로 늘었다. 정부는 무역업자와의 계약을 통해 의약품의 정식 수입을 허가했고, 최초의 수·출입도 이뤄졌다. 수입은 한약재(94만 달러)가 대부분이었고, 수출은 한약재(61만 달러)와 간유·한천(10만 달러)이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발발은 이러한 성과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부산과 대구로 피난한 제약업자들은 원료 구입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군납용 구급약품과 위생재료 생산에 의존하며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전쟁의 상흔은 협회에도 깊었다. 이동선 위원장과 이경봉 부위원장이 납북되며 지도력을 잃었고, 협회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1950년 이후 정기총회도 열리지 못했지만, 업계는 군납 입찰 순번제와 은행융자 배분 등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 생존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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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사변 이후 폐허로 변한 서울 시가지
04.

대한약품공업협회로 재탄생

1952년 11월, 한국전쟁이 휴전 국면으로 접어들던 시기 협회는 부산 계림화학에서 임시총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유특한을 제4대 회장으로, 김근규와 이성규를 부회장으로 선출했다. 또한 기존의 직함이던 ‘위원장·부위원장’을 ‘회장·부회장’으로 바꾸며 조직 운영의 틀을 새롭게 정비했다.

1953년 3월에는 부산 부용동 이화여대 임시 교사 강당에서 제8회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회원 47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종건 초대 부회장이 제5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김근규·이덕휘가 부회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협회는 이 총회에서 조직의 성격을 사단법인으로 전환하고, 명칭을 ‘대한약품공업협회’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6월 3일 보건부로부터 법인 설립 허가를 받으며 새로운 출발을 공식화했다.

이 시기 협회는 운영 체계도 한층 강화했다. 회장단과 사무장 외에 감사 3인과 15명의 이사진을 신설해 보다 체계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마련했다. 또한 1953년 5월에는 부산을 떠나 서울 종로구 관철동 삼성제약 건물로 사무실을 옮기며, 다시 수도권 중심으로 활동 기반을 다졌다.

한국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협회는 제약업계의 구심점 역할을 이어갔다. 창립 8년 만에 ‘대한약품공업협회’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제약산업 재건과 자립을 향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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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약품공업협회 현판
05.

ICA 자금 활용, 산업기반 구축 지원

1955년 미국 원조기구가 FOA에서 ICA(국제협력처)로 개편되면서, 한국 제약업계에도 본격적인 원조 자금이 들어왔다. 협회는 부흥부를 설득해 같은 해 제1차 제약시설 자금 46만 5,000달러를 확보했고, 이는 유한양행·동아제약·동양제약·근화제약·서울약품 등에 배정되었다. 1956년에는 대한비타민·태양제약·범양약화학 등 5개 업체가 2차 자금을 배정받았다.

1955~1958년 사이 제약업계에 투입된 ICA 자금은 총 112만 3,352달러로, 항생물질 소분제제 시설과 합성 설비 도입에 주로 쓰였다. 미국·서독제 최신 기계가 설치되고 대규모 원료의약품이 수입되면서 국내에 현대적 개념의 제약 기술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자금 배분 과정은 협회 내 갈등을 불러왔다. 수입업자를 대변하기 위한 대한의약품수출입협회(1957년 출범)와, 대형 제약사들이 주도한 한국항생물질협회(1957년 출범)가 잇달아 생겨났다. 특히 한국항생물질협회 창립으로 협회 회장단이 총사퇴했고, 같은 해 11월 임시총회에서 전규방 제7대 회장이 선출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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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 차관으로 건립된 동아제약 항생물질 생산공장 준공식(1958.5)
06.

단합과 도약의 상징, 약공회관(藥工會館) 건립

협회는 쇄신과 단합의 상징으로 독립 사옥 건립을 추진했다. 1956년 7월 서울대 약대 강당에서 열린 제11회 정기총회에서 회관 건립을 결의한 뒤, 1957년 10월 회장단과 6개 제약사(유한양행·근화제약·유린제약·종근당제약·환인제약·동양약품)가 참여한 신축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약사회 등이 공동 건립을 제안했으나 비용 분담 문제로 협회 단독으로 추진하기로 했고, 명칭은 ‘약공회관’으로 정해졌다.

1958년 3월에는 회관건립추진위원회를 공식 발족하고, 같은 해 7월 정기총회에서는 사업 연속성을 위해 회장 임기를 1년에서 2년으로 개정했다. 이후 종로구 관철동 76평 부지를 매입하고, 1959년 3월 철근콘크리트 4층 규모의 건축 허가를 받아 4월 18일 기공식에 들어갔다.

건립 자금은 ICA 원조자금을 지원받은 업체를 중심으로 회원사들이 힘을 모았고, 보건사회부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회관 건립은 단순한 사옥 확보가 아니라, 제약업계의 단합과 재도약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959년 8월 상량식에 이어 11월 낙성식을 가진 약공회관은 협회 창립 14년 만에 마련된 독자 사옥이었다. 이는 제약계뿐 아니라 당시 80여 개 민간단체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 회관을 세운 사례로, 제약산업이 사회적 위상을 높여가고 있음을 알리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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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약품공업협회 관철동 소재 약공회관 기공식(1959.4)